열정
열정

기획자 없이 개발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렇다고 기획자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기획자가 개발을 하는 것이고, 개발자가 기획을 하는 것일 뿐이다. 원래 장인들은 기획과 개발을 따로 하지 않았다. 효율성이라는 것이 세상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기 시작하면서, 기획은 기획자가 개발은 개발자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더 높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효율성의 비약적인 향상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 끝에서는 버려진 열정의 시체가 산을 이룬다.

기획과 개발을 좀 더 일반적인 용어로 풀어쓰면 기획은 의지가 되고, 개발은 행동이 된다. 다시 의지와 행동을 그룹핑해서 하나로 묶으면 자유가 된다. 때로 자유를 억압이 없는 '상태'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반쪽 짜리 정의다. 오히려 자유란 의지와 행동으로 억압을 해체하는 '과정'이 아닐까? 의지와 행동이 없다면 억압이 없어도 억압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속의 사자가 평생을 우리를 원망하다가, 어느 날 열려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못 본 척 딴청을 부리는 것처럼...

자유란 열정이 부화되기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이다. 이 시대가 열정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것은 의지와 행동을 분리함으로써 자유가 훼손됐기 때문이다. 원래는 하나인 것을 경영과 노동, 기획과 구현으로 분리했기 때문이다. 내 생애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순간은 본가에 콕 박혀서 일년이 넘는 시간을 머 좀 만들어 보겠다고 뚝딱뚝딱 거리던 시절이었다. 기획하면서 잠들었고, 깨어나면서 코딩했다. 기획과 구현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속되어 있었고, 프로덕은 나의 자연이었고, 나는 프로덕의 자연이었다. 이것은 때로 광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취직을 했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래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나는 원래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열심히 일한 것은, 열정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열정의 빈자리를 열심으로 채우지 않았다면 붕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살았지만, 열정적이지 않았고, 모범적인 직장인이었지만, 이상적인 자유인은 아니었다. 경영이 잘려나간 노동, 기획이 잘려나간 개발의 안락함에 길들여져만 갔다. 능수능란한 구성원이 되어갔다.

그런 점에서 분업화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자유인으로써의 존엄을 사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깊이 존경한다. 이들의 정체성은 직업으로 범주화되지 않는다. 메타블로그 서비스 믹시의 endless9님이 그랬고, 설치형 메타블로그의 라지엘님이 그랬고, grboard의 시리니님도 그랬다. 지금은 텍스트큐브와 티스토리가 된 태터툴즈의 정재훈님은 이미 전설이 됐고, 제로보드의 제로님은 그 보다 유구한 전설이다. 이들도 언젠가는 소위 '성공'이라는 것을 할 것이다. 그리고 조직이라는 것을 기획할 것이다. 그 때 부디 성공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기를 바래본다. 열정이 없는 인간은 사는게 고되다.


          + 괴물
          + 아버지


2009/07/13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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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friedpotato's me2DAY 2009/08/03 21:01 x
제목 : 지하생활자의 생각
뚝 릴렉스가 제일 좋죠. 열정은 도적처럼 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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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멤피스의 생각
원래 장인들은 기획과 개발을 따로 하지 않았다. 효율성이라는 것이 세상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기 시작하면서, 기획은 기획자가 개발은 개발자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비밀방문자 2009/07/13 23:47 L R X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going 2009/07/17 00:49 L X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미 뜨겁게 살고 계십니다. 정말로.
mooo 2009/07/14 09:53 L R X
의지와 행동이 묶이면 자유가 된다는 생각은 신선하고 재미있네요. 하긴 egoing님 생각들 중에 신선하지 않은 것이 있나요. :-)

기획과 개발, 사실 이 둘은 서로 떼어놓기 힘든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제 트위터에서 하신 말씀들을 가만 보고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었지만, 분업화도 좋지만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네요.
egoing 2009/07/17 00:50 L X
이해는 가지만 잃는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분업화의 끝에서는 기계와 다를바가 없어질지도 모르겠어요.
대흠 2009/07/14 15:44 L R X
트위터에서 헤매다 여기까지 왔네요. 두고 곱씹어 볼 글이네요. 구글리더 목록이 점점 길어집니다.^^
egoing 2009/07/17 00:51 L X
별볼일 없는 글인걸요. :)
시리니 2009/07/14 17:02 L R X
글 끝에서 제 닉네임이 나와 깜놀했습니다 ㅎㅎ;; 지금의 제가 "자유인" 으로서 다른 분들과 함께 나란히 거론 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
egoing 2009/07/17 00:51 L X
시리니님을 이웃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멋지십니다. ^^
miriya 2009/07/14 19:08 L R X
아.. ㅠㅠ 역시 개발을 배워야해
egoing 2009/07/17 00:52 L X
ㅎㅎ
최동석 2009/07/16 21:32 L R X
"열정이 없는 인간은 사는 게 고되다." 명문입니다. 회사에서도 삶이 고된 사람이 참 많습니다. ^^
egoing 2009/07/17 00:53 L X
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요즘들어 열정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silent man 2009/07/18 21:47 L R X
열정도 없는데 뭔가를 열심히 하지도 않는 저는 잉영...?
아아아~~~
egoing 2009/07/22 00:12 L X
뚝 릴렉스가 제일 좋죠. 열정은 도적처럼 옵니다. ㅎㅎ
쿨짹 2009/08/07 05:11 L R X
그래서 요즘 좀 고되요...
ㅎㅎ
egoing 2009/08/07 10:08 L X
곧 열정이 살아날꺼예요. 인생은 롤러코스트 같은거니까 :)
nullvana 2009/08/18 10:58 L R X
포스트 잘 읽었습니다. :) 최근에 부쩍 고민하고 있는 내용이라 공감이 큽니다. 프로세스와 함께 열정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시스템... 만들기도 만나기도 힘드네요.
우주중년 2009/08/26 18:25 L R X
기획 파트에 있으면서 열정을 10년간 태워봤는데... 역시 산업은 기획자건 개발자건 생산자를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 사이 와이프가 생기고, 아이가 생기고, 동력은 열정에서 돈으로 변화하더군요. 열정은 태우면 모닥불처럼 열량도 생기지만 운치도 있던 건데, 이거 돈을 태우다 보니, 그 운치의 결핍을 메우려고 쓰잘 데 없는 취미만 늘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느낌. 지금은 항상 그 고민을 합니다. 시스템만은 진일보가 어렵더라도 어떻게, 정신만은 좀 차리고... 아니 적어도 열정을 보호하며 살 수 있는 개발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허황된가요? ㅎㅎ
egoing 2009/08/28 17:56 L X
취미를 언급하신 부분에서 묘한 여운이 있습니다. 취미라.... 허황될 지언정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가치란 허황될 때 가치있는 것이죠. :)
토마토새댁 2009/09/24 13:12 L R X
열정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내 아이들은 나보다 일찍 개달아줬으면 하는 희망사항이 있다는...^^

날씨 넘 이뽀요..
행복하세욤~~
egoing 2009/09/25 23:37 L X
날씨 넘 이뽀다는 말이 넘 이뽀내요. 토마토새댁님도 토마토 같은 주말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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