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에 대한 이러한 물음은 사실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외계인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일 뿐 그것은 우리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외계인은 어떤 존재일까?
화성에서 생명체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생명체는 바퀴벌래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외계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외계생명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외계인이란 인간이상의 지적 생명체를 의미한다.
인류보다 광년이 앞선 문명을 지닌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가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첫째, 적이라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화성의 바퀴벌래를 죽인다고, 이를 살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보다 뛰어난 지적생명체에게
우리는 외계인이 아니라, 외계생명체에 불과할 것이다.
타인에게 배타적인 생명의 이기적 속성상
외계인은 우리를 위해하려 할 것이다.
혹, 악어새와 악어와 같은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는 계약에 의한 관계일 뿐,
서로의 필요가 사라지는 순간 서로는 적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오늘 저녁상에 올라온 돼지고기와
콜롬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의 원주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친구, 혹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인류는 그동안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
그 불안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시작된다.
인류가 핵무기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졌치면서
처음으로 인류 스스로 자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것이 기술적 결함이 되었건,
미치광이 정치인의 결단이 되었건,
국제정치의 모순에 의한 아무도 원치 않는 전쟁이건
그 가능성은 날로커지고 있고,
더 많은 사람이 고통없이 죽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지고 있다.
다시 생각해보자.
광년을 앞선 지적생명체가 있다면,
그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힘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하지 않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면
그들은 그 힘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비법이 무엇일까?
여러가지 가정이 있을 수 있겠다.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고,
보다 강력한 통제력을 유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 하려는 것은
좀더 인간적인, 사회적인 맥락이다.
제어하기 어려운 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문제들은
운이나, 통제력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세계사적인 비극들은
집단을 이루고 있는 개개인의 인간과
개개인의 인간이 모인 집단이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것은 우리자신과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의 동상이몽과 흡사하다.
세포들은 끊임없는 세포분열을 통해 삶을 추구하지만
세포들의 공동체인 우리 자신은 생활에 대한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또, 우리 자신은 오래 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세포가 암세포로 변하면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는가?
한 문명의 지속가능성은 매우 복잡한 고차원 방정식이다.
이 등식에 동원되는 조건들은
정신에서 물질을 아우르는 광활한 스팩트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방정식을 해결한 문명만이
광년을 앞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에 대한 근본주의적인 의식이 없다면
문명은 그 힘에 비례해 철저히 자멸할 것이다.
인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경험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끝간데 없이 발달해
종교의 영역까지 도전할 태세임에 반해,
우리의 정신적 성취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이 것은 흡사 신체적으로는 어른이면서,
정신적으로는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고등학생의 위태로움과 비슷하지 않은가?
인류는 이제야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광년을 앞선 문명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은 가정이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적인지, 친구인지는 실제 관심사항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광년 후에도 이 땅에 뿌리 밖고 살기 위해서는
힘에 걸맞는 정신을 갖추는 것이 힘을 갖추는 것만큼 중요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대한 기록필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