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를 추억하다
기형도를 추억하다 기형도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물리 교생으로 온 선배의 권유 때문이었다.
선배는 두 권의 시집을 선물했는데
하나는 류시화의 '나는 내가 옆에 있어도 그립다'였고
하나는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이었다.
선배는 주의를 당부했다.
기형도의 시는 조심해야 한다고...
금기만큼 치명적인 유혹이 또 있을까?
나는 그가 경고하며 권했던 선악과를 먼저 깨물었다.
그리고 지독히 어두웠던
나의 중세(中世)가 활짝 열렸다.

아! 기형도.
파괴적인 것만큼 건설적인 것이 있을까?
나의 정신에서 8할은 기형도에서 촉발된 고통에 신세 지고 있다.
아이는 심하게 아픈 후에 성숙한다고 했던가?
고통은 가혹하게도 여기가 더는 편안한 자궁 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유대인, 성적소수자, 수많은 콤플렉스가 이룬 거대한 성취는
고통이 창조적 파괴의 숨은 공로자라는 것을 어렴풋이 증언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비극적이고 염세적인 언어들은
나의 정신을 이루는 뼈의 마디 마디를
재구성하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동시에 나의 희망은 절망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기형도는 어떤 종류의 고통이었느냐고?
그것은 치명적인 죽음의 유혹이었다.
어떤 이는 병아리를 통해 죽음을 경험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이것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나는 기형도를 통해 죽음을 경험했다.
그의 언어는 나침반 속에서 시종일관 죽음이라는 자장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고,
그것을 선선히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요절함으로써 이것을 증명했다.
그 죽음의 암시가 너무나 강렬해서
나는 몸이 아플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경험했다.
그래서 나는 더는 기형도의 시를 열지 않는다.
너무나 아팠고,
돌아갈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추억할 뿐.

그러나 그는 나의 사전 속에 그로테스크라는 번지수에 생생히 살아있다.
평론가 김현은 그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했다.
그를 규정하는 두 단어 그로테스크와 리얼리즘.
나에게 리얼리즘은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들이 공유하는 공공재이다.
그러나 그로테스크는 오직 기형도 혼자서 탐욕스럽게 독점하고 있는 사유재이다.
내가 이례적으로 하나의 단어에 대한 사적소유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
그의 탐욕이 너무 강하고,
그의 욕망이 너무 견고한 나머지
사유화를 인정 당한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은
기형도와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으로 동치될 수 있다.

그 아픔이 너무 강렬해서일까?
기형도를 아는 사람들은
기.형.도라는 이름만으로도
잊혔던 감정들이 뛰쳐나와
얼싸안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기형도를 아는 누군가와
기형도를 아는 나는
그로 인해 뛰쳐나온 감정들의 인사가 끝나기를
어정쩡하게 기다린다.

행복
그것은 꼭 유쾌한 감정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의 고독은 쾌락을 보내 우리를 기만하지 않는가?
나와 같이 소박한 '정상인'은
고독이 도사리는 칠흙같은 어둠을 보며
'저기에 뭐가 있을까?'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지만
기형도와 고흐는
우리를 대신해 그곳을 탐색하고 있다.
그들이 직면한 고독을 3,500원의 시집과,
5,000원의 싸구려 화첩을 통해 간접경험한다.
나는 그들 같이 살아갈 자신이 없는 '소시민적인 정상인'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가식적인 유쾌로 행복을 가장할 것인가?
꾸역꾸역 올라오는 감정들을
또박또박 느끼며 살 것인가?

PS.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형도를 권해본다.
하지만, 그의 언어는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여정.
Van Gogh 를 민노씨가 보고 트랙백을 보내다.
민노씨의 기형도와 나 를 읽고 그 발아점인 내 인생의 중세- 기형도를 읽다
민노씨의 블로그에 댓글을 하다.
댓글을 다시 포스트로 (기형도를 추억하다)로 옮기다.
포스트는 언어를 찾지 못하고 일주일간 글 목록에서 비공개로 방황을 하다
일주일 만에 공개되다.
2007/08/2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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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Eunki + Script 2007/09/26 23:49 x
제목 : 내 나이 29, 다시 '기형도'전집을 꺼내들었다.
습관처럼 다시 기형도 전집을 꺼내들었다. 내가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절, 구겨진 A4용지와 모나미 볼펜만으로도 무엇인가 쓰려고 노력하던 밤들이 그리워질 때면 나는 늘 기형도 전집을 ..
Tracked from 하루를 여는 시 한편 ™ 2007/11/30 14:31 x
제목 : 기형도를 추억하며,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 "입속의 검은 잎"
기형도 시인은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1994년), 가장 먼저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인입니다. 존경하는 친구가 생일 선물로 주었는데, 제 인생에 커다란 반성과 삶에 대한 애착을 전해준 것 ..
情人 2007/08/26 13:56 L R X
기형도 선악과 따먹고 싶어지네요.
그러고 보니 '기형도'라는 것이 무슨 뜻인 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글을 읽기전, 이걸 '선험'이라고 표현하면 될려나?? '기형도'라는 단어를 맨 처음 느낀 감상은 약간 코믹하면서 좌충우돌 정리가 안된 듯한..하고 무의식중에 느낀 것 같은데

이글을 다 읽고 나니 뭔가 기기묘묘한 느낌이네요. ^^
egoing 2007/08/26 16:04 L X
아! 기형도는 시인의 이름입니다. 매우 염세적인 시를 썻는데, 이 글은 염세보다는 근거없는 낙관이 더 위험하다는 내용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기기묘묘하게 느꼈지셨다는 저의 잘못이지 기형도 형님의 탓이 아닙니다. ^^
情人 2007/08/26 13:57 L R X
잘 읽었습니다.
egoing 2007/08/26 23:12 L X
감사합니다.
민노씨 2007/08/26 19:03 L R X
본문은 물론이지만, '여정' 부분은 참 반갑네요.
제 글이 링크되어 있어서 더 그렇기도 하지만, ㅎㅎ, 물론 그런 이유에서만 그런 것은 물론 아니구요.

'롱테일'이란게 별개 아니라, 이런 글과 사유들의 만남과 여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 )
egoing 2007/08/26 20:45 L X
블로깅의 어려움이라는 글에서도 적었습니다만,단지 댓글을 다는 것만으로도 잠자고 있던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흔들어 깨우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정을 달아본 것은 발아점이 된 블로거분들을 기쁘게하는 효과도 있습니다만, '모든 생각이 하늘에서 뚝떨어지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기록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아이디어는 민노씨의 발아점에서 얻었습니다. 저는 여정이라고 표현하려고 합니다. 이제 주말이 몇시간 남지 않았군요. 평범한 직업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월요일 힘차게 시작하세요.
비밀방문자 2007/08/26 19:08 L R X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going 2007/08/26 21:22 L X
사려깊음에 꾸벅. ^^
time0808 2007/08/26 22:17 L R X
짧은생을 마감하신분이지만 아직도...아~~기형도!! 가방짧은 사람은몰라~몰라 ㅋㅋ 다음글은 이외수님껀 어떠실런지 "작문연습생에겐 최고!!최고 요즘인터넷 폐인들 3대지침서:주침야활, 면식수행,애국지존 (본문중) "장외인간"기냥후려갈긴듯~~~문장하나하나살살 녹아 미끄러짐다!! 기형도넘 ~깊지안나염 개인적으론 머리가쬠 부실해서...기냥 바로 와닷는거아님....편안한 밤되시구 월날두 관리아저씨 홧띵!!ㅎㅎ^ ^
egoing 2007/08/26 23:10 L X
기형도가 깊다기 보다, 기형도를 '향유'할 수 있는 감수성이 드문거겠죠. 글에서 고백했듯이 저 역시 이제는 기형도를 열지 않습니다. 제가 기형도에 빠진 것은 사춘기의 질풍노도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거예요. 기형도는 머리로, 잔잔한 마음으로는 공감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 같아요. time0808님도 월요일 힘차게 시작하세요.
egoing 2007/08/26 23:11 L X
이외수님의 소설은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한번 관심을 가져봐야겠내요. 추천감사합니다. ^^
가즈랑 2007/08/27 00:58 L R X
기형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제가 이렇게 다른 분들의 기억을 건드리고 다녔네요.(여정을 보고서)
좋은 글을 이어주셔서 감사하고.. 그런데 딱히 뭔가 적기 힘들어 이렇게만 짧게 남깁니다. 그래도 대화는 계속되겠지요..^ ^;
egoing 2007/08/27 01:08 L X
아닙니다. 진원지가 되어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겠죠.
저 역시 기형도의 기억이 아찔할 정도로 멀게 느껴집니다.
단지 저의 일부분으로 녹아있다는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대화는 계속되야죠 ^^
mine 2007/11/23 10:49 L R X
제가 기형도 시를 추천받은게 족히 2,3년은 지났을거에요. 언젠가 마음이 평온해졌을 때 감상할거야라는 생각에 서점에 갔다 감히 집어오지 못하고 도로 놓고 나왔다는 포스팅을 올린 적도 있었어요.
이번엔 해 바뀌기 전 읽을 마음가짐을 갖출 수 있으려나..
egoing 2007/11/23 11:12 L X
아 그러셨군요! 그의 시는 마음이 평온하지 않을 때, 평온하지 않음을 불살라버려서, 다시 평온해지고 싶을 때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sohon 2007/11/27 15:25 L R X
기형도를 추억하시는 분이 여기 또 계셨네요..고등학교때 영화관에서 만난 여자친구에게 기형도 산문집을 사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시집을 읽고 또 읽고,김현이 쓴 기형도 평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대학강사에 관한, 언어를 가르치는 강사, 강의시간에 말을 하지 않았던, 그러나 그 학기가 지나가 모두가 더 말에 대해 언어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됐다는 내용의 시가 문득 떠오릅니다.. 퇴근후에 책장에서 입속의 검은잎을 다시 찾아봐야겠어요..
egoing 2007/11/27 15:29 L X
저 역시 그를 좋아했던 동지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블로그와 청주 그리고 기형도. 우리를 관통하는 공통분모가 꽤나 버라이어티합니다요. 그렇죠? ^^
sohon 2007/11/27 17:44 L X
그러게요.. 언제 공통분모를 모아서 그 분모를 꿰고 있는 교집합 모임을 만들어도 재밌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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