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은 세상을 바라보는 세련된 시각을 제공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념을 공부한다. 문제는, 이념화된 인간은 장님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나 스미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서, 장기를 기증한다는 데, 이 위대한 사상가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증한 장기로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으니....
히치콕이 고안한 카메라 앵글이 공포스러운 것은, 주인공의 뒤태를 응시한 시선의 의도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념이란 무지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는 일종의 스포일러로서 기능한다. 스토리를 미리 알고 있다면, 두려울 필요가 없다. 그 틀 안에서 예측하고, 해석하며, 심지어 틀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를 가져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념은 배우고, 익히고, 잊어버려야 한다. 모든 이념은 진실을 탐구하는 자세를 견지하지만, 성취에 대한 기득권의 성격도 띠기 마련이다. 이 기득권이야말로 이념을 진실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다. 세상의 모든 이념은 창의적인 발상, 생각하는 방법, 역사의 중요성을 교훈으로 남기고, 최종적으로 잊혀져야 한다. 이것은 분서갱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한 인간이 이념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문제는, 단 하나의 이념 조차도, 한 인간이 평생을 몰두해도 부족할 만큼 방대한 성취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반대의 지점에서 대립하고 있는 이념을 동시에 배운다면 글쎄. 재미없지 않을까? 또 이념에 대한 이런식의 접근이 과연 가능할까? 좀많이 회의적이다. 자신의 이념적인 지향을 견고히하고,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반대 진영의 이념을 공부하기는 하지만, 양극의 이념적 시각을 자아의 한 시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경계인, 회의주의자라고 하는 것 같지만, 이들은 언제나 멸종 위기이다.
그래서,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인들의 해석이 냉정한 관찰자인 생활인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하는 것이 아닐까? 이념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버릴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실들이 버려지고, 얼마나 명백한 인식들이 논리적인 완결성의 희생량이 되었는가? 지식인에 대한 생활인의 비교 우위는 그들이 버릴 것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그들은 세계적인 형상, 보편적 이상, 형이상학, 역사와 같이 세련되지만, 조작되기 싶고, 검증하기는 어려운 가상의 사실을 인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식에 기대서 세상을 판단할 뿐이다.
그렇다고, 이념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고, 생활인이 모두 맞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