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력
분류없음 | 2007/12/23 21:25

우리 사회는 공부와 추궁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기억력이다.
그 반대편에서 외면당하는 또 다른 능력이 있는데
바로, 망각하는 능력이다.
잊어버리는 것을 능력이 아닌,
기억력의 한계로 치부하는 우리 사회에서 망각은
건망증이나, 치매와 같은 우울한 언어를 육체로 가지고 있다.

학창시절,
부실한 기억력을 참 많이 저주했었다.
아. 기억력이 조금만 좋았더라면!
하는 어리석은 회한은 지금도 솔직히 하는 중이고...

하지만,
이제는 망각을 하나의 능력으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편이다.
부끄러운 짓거리를 많이 해대고 다니는 내가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이 압도적인 기억의 중량감에
한 달도 견디지 못하고 무서운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특히나, 화장실에서.

만성 과민성대장염을 겪는 나에게
화장실이란
인생의 4.1퍼센트와
사유의 40퍼센트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이른 아침,
비몽사몽 간에 쇄도한 엉덩이와
얼음장 같은 좌변기의 냉정한 접촉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그 전날의 기억을 하나하나 호출한다.
이내, 불려나온 기억들은
괄약근의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대장이 밀어내는 압력에 따라
혐오와 후회로 재구성되면서 마침내 배설된다.

섭취에서 배설에 이르는 여정이
대체로 1일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기억력이 조금만 더 좋았거나,
망각력이 조금만 더 구렸다면,
화장실은 건전한 배변의 장이 아닌,
참혹한 고문의 장이 되었을 것이다.
변비 환자의 그것처럼.

절기마다 찾아오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이 있다.
사춘기 때의 신체적인 변화에서
병영에서 마주한 계급적 변화와
월급통장 속에 프린트된 경제적 변화
그리고 서른을 목전 둔 지금
아직은 만족스럽게 '이것이 머다'라고 정의하지 못하는 이 모호한 변화까지.....
천재적인 망각력이 나에게 없었다면,
나는 진작에 파멸했을 것이다.

2007/12/23 21:25 2007/12/23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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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mepay 쇼핑몰 전문 블로그 2008/05/19 01:11 x
제목 : 쇼핑몰 "힘든시기.. 넘겨야.."
러시아에 어떤 사람은 기억력이 너무좋아 잊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1234567890" 처럼 연관있는 것은 물론"3642859484" 처럼 아무 연관 없는 것도 순서대로 정확히 기억하는 놀랄만한 기억력을 가졌?
비디 2007/12/24 02:30 L R X
므흣~하게 읽었습니다. ^-^
저도 망각력은 꽤 천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포스팅할 주제를 맨날 까먹어요.
egoing 2007/12/25 00:12 L X
저도 그렇답니다. 그래서 잽싸게 제목만이라도 블로그에 남겨두는 편인데. 몇일후에는 메모를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죠. 메모하고, 잊어버리는 것은 저에게 꽤나 지루한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mine 2007/12/24 09:01 L R X
제 망각의 최고봉은 '다'군 대학논술시험날짜를 까먹고 째먹은 일이죠...하지만 그날 저녁 엄마의 고함소리는 왜 잊혀지지 않는걸까요. 벌써 8년전일인데! 전 굵직한 일들은 잘 까먹고 사소한 것들은 잘 기억해내는 경향이 있어요. 이런 쓸모없는!!!
egoing 2007/12/25 00:25 L X
그게 다 능력이라니까요. 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사례는 절대 공개할 수 없고.... 어쨌든 용기 내시기를.
altcre 2008/05/07 18:36 L R X
그래서, 망각도 얼마든지 '력'이 될 수 있고, 기억은 '증'이 될 수 있습니다. 몽테뉴는 자기의 망각'력'을 자랑으로 삼았다지요. 망각함으로써 오히려 사물을 '일신일신우일신'하며 바라볼 수 있었답니다. ^^
egoing 2008/05/08 10:07 L X
그렇겠내요. 망각력을 좀더 소중히 여겨야겠내요.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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