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거실이 부산스럽다. 심지어 박수소리까지도 들린다. 안 봐도, 아버지의 건강요법일 것이다. 따뜻한 남쪽으로 여행을 간다고 저 난리를 부리고들 계신다. 시간은 5시. 이왕에 일어난 거, 그 길로 아침밥을 얻어먹고, 서울로 향했다.
재야의 종소리 때문에 잠들을 설쳐서 그런가? 터미널로 향하는 거리엔 인적이 없었다. 불길한 어둠 속에 터미널 대합실이 보인다. 대합실의 좀 지난 친 조도와 새벽녘의 어둠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팽팽한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다.
"남부터미널 하나 주세요"
버스에는 서너 명의 승객들이, 각자의 기호에 따라 좌석을 찾고 있었다. 장내의 조명이 꺼지고, 취~소리와 함께 입구가 닫혔다. 코트를 거꾸로 뒤집어쓴 나는 엔진의 미세한 떨림을 따라 빠른 속도로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버스는 한전문화아트 센터를 지나, 코너링을 하고 있었다. 원심력은 깊은 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웠다. 환하게 날이 밝아있었다. 잠 때문에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남부터미널에 도착했다. 조난당한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린채, 비틀거리며 지하철 역사로 떠내려갔다.
느릿느릿 계단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플랫폼의 벽에 몸을 기댔다. 방금 열차가 떠난 탓인지, 좌우 소실점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꽤 오랜시간이 흐른 후 지하철이 도착했다.
논현역에서 역사를 빠져나왔다. 출구 오른쪽으로 보이는 강남대로에는 거짓말처럼 쥐새끼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칼바람이 불었고, 나는 습관처럼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햇볓이 들지 않는 거실은 어두웠다. 빠꼼하게 열린 문틈으로 날카로운 빛이 사납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었다. 3일간 아무도 없었건만, 누군가 머물다 간 것처럼 공기는 훈훈했다.
리 턴을 봤다. 배우 김명민은 인간의 불행을 다루는데 아직 미숙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심리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최면으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전개한 점은 아쉽게 남는다. 최면은 아직, 과학과 신비주의의 모호한 경계에 있는 치료방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술하는 사람들, 저거 보고 겁 꽤나 먹겠다 하면서, 지식인을 검색해보니, 아니다 다를까? 수술 중 각성을 걱정하는 물음들이 빽빽하게 올라와 있었다. 스릴러가 영화 밖까지 확장되는 건 좀 곤란하지...
배가 고파왔다. 나가려고 하니, 추위에 몸이 움추러들었다. 닭한마리를 배달시켰다. "교촌치킨 입니다" 14000원을 지불하고 닭다리를 집어들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지? 어두운 거실과 접해있는 입구로 잽싸게 움직였다. "교촌치킨 입니다" 이상하다. 방금 다녀갔는데. 또 교촌이라고? 문을 열었다. 남자는 대뜸 손을 문틈으로 내미는 것이다. 그 손에는 무언가 들려있었다. 2000원이었다. 계산을 잘 못 했단다.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았다. 저녁에 먹어야지. 음악을 틀어놓고, 침대에 기댔다. 불규칙한 잠 탓인지, 의식이 심하게 불규칙하게 요동치며, 잠이 들었다. 간헐적으로 음악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어느 대목에서 의식이 단선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난 후, 영화 한 편을 더 봤다. "나는 전설이다" 윌스미스의 고독한 연기가 압권이었다. 동시에, 그의 가장 큰 약점은 그 캐주얼한 생김새라고 생각해봤다. 확실히 양키들은 참 진지하다. 그 친구들은 귀신 하나도, 과학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좀비가 바이러스라는 발상은 동양에서는 좀 오바스러운 것이다. 요즘처럼 과학과 종교의 영적인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바이러스를 통해, 삶과 죽음의 불안을 자극한다는 것은 참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생각도 해봤다. 쏟아지는 좀비 영화들은, 가장 근소한 차이로 현실의 공포를 재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창이 검게 변했다. 좀비가 올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