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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6   실패 (14)


실패
실패 집에 CPU 달린 장비나 AV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장비를 일절 들이지 않는 것이 오래된 정책이었다. 컴퓨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럼 나는 그의 물음을 재구성해서 물어본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집에서도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대체로 수긍한다. 문명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요즘 같은 세상에는 미덕이다.

그렇다 보니, 나는 여느 소프트웨어 개발자들과는 다른 생활 패턴을 갖게 되었다. 이른바 아침형 인간 말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근태의 상징이 되었다. 그랬던 나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8시 전의 출근을 금과옥조로 여기던 내가 출근 시간인 10시를 준수하기도 버거워진 것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선 노트북을 하나 질렀다. 좀 유비쿼터스 하게 블로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좀 핑계다. 나에게는 이미 블로깅을 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출중한 노트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좀 거대한 모니터를 함께 구입했다. 13인치의 작은 모니터에서 장시간 블로깅을 할 때 느껴지는 피로감 때문이었다. 또, 가끔씩 몰려오는 견딜 수 없는 적막감을 달래보고도 싶었다. 모니터는 TV튜너가 내장되어 있어서 TV로도 손색이 없었다.

우람한 근육질의 노트북, (제조사의 표현으로는)하이그로시한 모니터와 함께 있으려니, 생활은 자연스럽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최소한 2시 보통은 3시 심하게는 4시에 쓰러지듯 잠 속으로 미끄러질 때도 있었다. 노예가 되었고,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원래 의지라는 것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의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순간의 선택이 점점이 모여 있는 느슨한 선이다. 이 선을 빈틈없이 메우는 것은 다름 아닌 습관. 나는 습관을 신봉한다. 그럼, 습관은 무엇의 지배를 받는가? 환경이다. 아무리 완고한 습관도 결국 환경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노트북과 모니터라는 환경은 습관을 지배했고, 그 과정에서 의지는 무력했다.

노트북과 모니터를 살 때는 박약한 의지를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의지는 그렇게 단단해 진다고도 생각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다. 나는 이것들을 지배하는데 실패했다. 오려 지배당하고 있다. 그제부터 노트북을 회사에 두고 집에 갔고, 어제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잠을 청했고, 새벽같이 일어나자마자 모니터를 박스에 봉인하기 시작했다.

그 모니터는 이제 회사에 있다. 앞으로 평일에 노트북과 모니터가 집에 있는 일은 가급적 없을 것이다. 당분감 금단현상이 나를 괴롭힐 것이다.
2008/11/06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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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8con's me2DAY 2008/11/09 01:43 x
제목 : 8con의 생각
아무리 완고한 습관도 결국 환경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 egoing : 실패
taeco79 2008/11/06 10:02 L R X
회사로 옮길 수 있는 결단력에 박수를....
개콘의 독한 넘들 버전으로는... 독해~!
같은 생각이 많지만.. 지배되어 사는 것이
하루에 낙이 되어버려... 벗어나고 싶지만...
마음만 굴뚝이 된지 오래라는... ㅠ.ㅠ
egoing 2008/11/06 10:07 L X
박수 받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ㅎㅎ
맥퓨처 2008/11/06 10:20 L R X
말씀하신 내용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는 애플코리아의 환율정책 덕분에 새로운 노트북을 구매하지 못한 관계로 그나마 조금은 단절현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네요..
egoing 2008/11/06 10:39 L X
정말 다행이군요. 지름이 임박했군요. ^^
kkamagui 2008/11/06 12:53 L R X
대단하십니다. ^^;;;
저도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일을 하지만... 컴퓨터를 떠날 자신이 없어서 최대한 빨리 퇴근한답니다. 그리고는 집에서 최대한 일찍 취미생활을 시작하지요. 그러면 아무리 늦어도 2시에는 자더군요. ㅎㅎ
모니터를 회사로 옮길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
egoing 2008/11/06 19:01 L X
ㅎㅎ 회사에서 모니터를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답니다. (실망하셨으려나요?)
daybreaker 2008/11/06 13:07 L R X
저야 회사도 안 다니고 잠시 휴학 중인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컴퓨터를 계속 집에 두고 살지만, 1시가 넘어가면 스스로 재촉해서 빨리 자려고 하는 편이죠.;; 근데 이게 가족들 생활리듬하고도 맞춰야 하다보니 경우에 따라 가족들이 다같이 늦게 자야 하는 일이 생기면 또 리듬이 깨지기도 하고..;; 아무튼 건전한 생활리듬을 유지하는 게 쉽지만은 않네요. ^^;
egoing 2008/11/06 19:03 L X
건전하다는 것의 기준은 모호하지만, 저는 저의 삶을 적절하게 로드발렌싱하는 것을 원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삶의 부합되는 것을 건전하다고 한다면 지금 이 시간 모니터와 노트북은 저에게 분명한 위협인 것 같내요.
소은 2008/11/06 13:13 L R X
푸하핫, 자신을 시험해 보고싶으셨던거군요..
egoing 2008/11/06 19:04 L X
라기보다 사고 싶었던거죠. ^^
jingjing 2008/11/06 20:21 L R X
음.. 저도 얼마부터 24인치 와이드 모니터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생활패턴이 엉망이 되었어요;
그런데, 모니터를 가져다 놓을 회사가 없군요. 핫핫;
egoing 2008/11/07 02:58 L X
저는 심지어 거기에 2인치가 크내요 ㅎㅎ 징징님 보고 싶내요. ^^
ghost 2008/11/11 10:29 L R X
흠 지름신을 두둔하는 글이군요. ㅎㅎ 나쁜 것은 지름신 ㅎㅎ
egoing@gmail.com 2008/11/11 11:56 L X
아냐. 지름신은 다른 차원에서 언급된 고약한 놈일뿐. 이건 분명히 의지와 습관 그리고 환경의 복잡한 속사정에 대한 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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