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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6   감정의 의외성 (6)


감정의 의외성
생각 | 2007/08/26 23:02

#1

날씨는 덥고 훈련은 무료했다. 강당 입구에는 지루함을 견뎌보고자 예비군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태우고 있다.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나무그늘 아래에는 동대장들이 들으나 마나 한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동대장:훈련 교관) 한 예비군이 동대장들의 일단을 향해 걸어간다.

"조퇴를 좀 해야겠습니다"

시간은 4시. 5시면 훈련이 끝날 터였다. 동대장 중 한 명이 갸우뚱하며 묻는다.

"한 시간 후면 훈련이 끝나는데 좀 기다리시지 그래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요"

예비군의 안면은 초점이 다소 흐려졌을 뿐, 어떠한 감정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순간 동대장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귀동냥으로 사정을 엿듣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모르는 사람의 뜻밖의 불행도 그랬지만, 어떠한 감정도 흘리지 않는 예비군의 모습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분주하게 했다. 나는 도저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서둘러 강당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복잡하다. 예비군은 전파를 수신하지 못한 브라운관을 가득채운 수많은 실밥 한 가운데 검은색 불량화소처럼 요지부동의 자세로 서 있었다. 그는 곧 오열할 것이다.


#2

내일모레 군입대를 앞두고 고장 난 이빨을 수리하러 치과에 가는 길이다. 아버지와 나는 오히려 평소보다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일 지나가던 익숙한 길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좋은 기분이다. 얼쿠! 과속방지턱을 미쳐보지 못했던 나에게 노면의 굴곡이 그대로 전달된다. 그 순간 왈 콱 눈물이 쏟아져버렸다. 나는 재빨리 눈물을 훔친다. 왜 이러지? 입대를 앞두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던 나를 내심 든든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그러나 눈물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발견할 때까지..... 아버지는 털털하게 웃어 보였지만, 우리는 치과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


내일 군입대를 앞두고 나는 가까운 친지에게 전화로 인사를 한다. "저 내일 군대 가요" 똑같은 맨트와 똑같은 반응이 막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여보세요"

저쪽에서 이모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모 잘 계셨죠? 저 태경인데요. 저 내일 군대가요"

나의 목소리는 권태롭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했다.

"어 태경아. 군대 간다고?"

왈 콱 전혀 예지하지 못했던 울림이 목젓에서부터 느껴지면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불과 1초가되지 않는 사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ㅇ..."

더는 말을 잊지 못했다. 목이 매인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이모.
나에게 서수를 붙이지 않은 이모는 셋째 이모를 의미한다. 88년 전까지 이모부는 청주에서 손꼽히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모부의 회사에서 총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철제를 가공하던 이모부는 전자업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당시 어렸던 나는 공장에서 부지런히 납땜을 하던 누나들의 손놀림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윤가라는 사기꾼과 상공회의소의 고위인사가 개입하면서 급기야 부도를 맞게 되었다. 이모부의 전 재산은 증발했고, 얼마 후 이모부도 세상에 안 계셨다. 파국은 우리 가족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전 재산을 담보로 내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칡 흙같은 어둠을 틈타 대전 큰 이모 댁으로 야간도주라는 것을 했다. 누나와 나는 맡겨졌고, 아버지는 유치장이라는 곳을 다녀왔고, 엄마는 야쿠르트 아줌마를 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 엄마가 이모부를 원망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당신들은 혼자가 된 이모를 언제나 걱정했다. 이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고3이었던 이모의 아들인 사촌형은 삭발을 했다. 전교일이 등을 다투던 형의 친구는 서울대 법대를 차석으로 들어갔지만, 형은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이모부를 대신해서 형의 입학식과 졸업식에 참석했다. 형은 처음부터 나의 정신적인 맨토였고, 내가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비좁은 옥탑방의 한구석을 흔쾌히 내어주었다. 이제는 그 때의 충격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지만, 그 당시의 아픔은 어렸던 나에게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서로 의지하면서 시련을 함께 극복한 이모는 단순히 '친척'이라는 어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애뜻하고, 가엽고, 감사하고 와 같은 복잡한 수사로도 잘 설명이되지 않는 무엇이다.

"태경아 잘 갔다와"

".ㅇ..ㅕ.ㅣ..."


나는 바보같이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2007/08/26 23:02 2007/08/2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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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zche 2007/08/27 00:39 L R X
누구에게나 시시콜콜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사정을 겪고, 치유하고, 다시 원래의 생활을 찾아가고... 그러는거 같아요.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지만, 지금이니까 다시 곱씹어 볼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egoing 2007/08/27 09:33 L X
맞아요. 그리고 저런 가혹한 과정을 통해서 가족들은 휠씬 견고해졌구요. 제가 진혁이를 이뻐하는 것도, 누나랑 같이 고생한 경험이나, 가족의 소중함 이런 것들의 결과이구요.
time0808 2007/08/28 00:03 L R X
태경님 얼~~라를 나~~아보삼 더 이쁘지롱~~~!!ㅋㅋ 안녕 주무세요 (예의 바르게) 꾸벅
egoing 2007/08/28 00:41 L X
예 타임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
xizhu 2007/08/28 10:46 L R X
마음이 번쩍 뜨이는 글, 잘 읽고 갑니다
egoing 2007/08/28 13:54 L X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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