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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과 위성, 자아와 자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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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과 위성, 자아와 자의식 '나'로 사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지만, '나'를 규정하는 것은 후천적인 것이다. 편의상 전자를 자아로 부르고, 후자를 자의식이라고 내 맘대로 부른다. 자아는 날 때부터 주어지는 빌트인(built in)이다. 내 안에서 나의 외계를 관찰하고 인식한다. 반대로, 자의식은 후천적으로 득템하는 에드온(add on)으로 추정된다. 자의식은 자아와 다르게 제조된다. 이것은 자아를 복제하고 마치 인공위성처럼 외계로 쏘아 올려진다. 궤도에 진입한 자의식은 자아를 행성으로 삼고 그 주위를 뱅뱅 돌면서 자아를 관찰한다. 외계에 대한 관찰자인 자아와 자아에 대한 외계의 관찰자인 자의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럼 자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것은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자의식을 생산하는 메이커는 자기혐오고, 이것은 대체로 사춘기의 시대적 우울을 자원으로 한다. 사춘기의 극심한 고통은 살기 위해서 자아를 복제하는데, 복제된 자아는 일단 고통을 분산시킨다. 그 메커니즘의 핵심이 객관화다. 자의식은 주관 속에 갇혀있던 자신을 객관화한다. 객관화는 자기를 '타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타인인 양 무심하게 바라보면, 견딜 수 없는 것도 견딜 수 있는 것이 된다.
+ 혐오의 역사
2009/08/14 1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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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r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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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rix 영화 매트릭스가 그 전까지의 SF 선배들과 구별되는 것은, 이것이 소프트웨어와 정보에 대한 판타지라는 점이다. 이전까지 SF의 중심테마는 주로 기계문명의 힘과 그에 대한 불안이었다. 스타워즈가 그랬고, 터미네이터가 그랬다. 매트릭스는 정신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을, 논리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페러다임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그 중심에 스미스 요원이 있다. 사실 이 영화의 백미는 네오가 아니라 스미스 요원이다. 네오야 성서적 메시아의 SF적 재탕일 뿐이다. 네오의 등장은 터무니 없지만, 스미스 요원은 '일리'있다. 인간이 기계를 만들었고, 기계는 다시 스미스 요원을 만들었다. 스미스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생명체라는 점에서 그 조부모인 인간이나, 그 부모인 기계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에게는 물리적인 육체가 없다. 그에게 육체란 소프트웨어이고, 정신은 정보이다. 이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사뭇 충격적이다. 생산자와 복제자의 차이다. 2편부터 스미스는 자신을 복제할 수 있게 된다. 네오 앞에 나타난 스미스는 자신을 무한히 복제해 네오를 물리친다. 생산과 복제는 어떤 관계일까?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점에서 생산과 복제는 동일하다. 하지만, 생산은 자본과 자원 무엇보다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복제는 이런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소프트웨어에서의 복제란 약간의 메모리 증가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특히 복제와 함께 스미스 요원의 또 다른 필살기인 감염은, 타인을 자신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무시무시하다. 이것은 메모리의 추가적 점유조차 유발하지 않고, 자신을 무한 증식하는 방법이다. 이 복잡한 영화에서는 다양한 긴장이 존재하지만, 복제자에 대한 생산자의 공포야말로 영화가 뿜어내는 불안과 공포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은 단지 워쇼스키 남매가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최초에 세계최고의 IT 기업은 IBM이었다. 그들은 하드웨어를 만들었다. 얼마 후 거대 소프트웨어 기업 MS가 등장했고, 곧 세계최고의 기업이 되었다. 다시, 구글이 등장했다. 구글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세계최고의 기업을 향해 행군중이다. 헤개모니가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다시 정보로 이동하고 있다. 다시말해, IBM이라는 생산자는 MS라는 복제자에게, MS라는 생산자는 다시 구글이라는 복제자에게 왕좌를 물려주고 있다. 매트릭스가 고도화 될수록 전무후무한 복제자가 출현할 것이다. 얼마전 온라인 게임의 아이템 거래를 불법으로 규정한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직간접적으로 연류된 인사만 1만명, 거래규모로는 1조원이 넘는 거대 산업에 대한 불법성을 따진 것이다. 이것은 두개의 정부 간의 긴장을 암시하는데, 두개의 정부란 오프라인의 전통 정부와 온라인의 신흥 정부를 말한다. 두개의 지배자 간의 긴장은 이미 곧곧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 격전지가 약관이다. 약관이란 가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생활양식을 규정한다. 그렇다보니, 게이머들에게 약관은 헌법의 영향력을 상회한다. 게임업체는 계정압류를 약관에 반영해 줄 것을 일관되게 요구하고 있다. 계정압류란 게임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인데, 오프라인으로 치면 사형에 준하는 극형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보고 있으면, 견해가 없고, 입장이 없다. 게임산업은 육성해야겠고, 제 자식들이 게임하는 것은 지독히 싫어하면서, 정작 자신은 게임을 해본 적도 없는 관료들에게 견해를 요구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일지도 모른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나고 있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갈등은 좀 더 구체적인 충돌로 고도화 될 것이다. 가상의 세계란 무엇일까? 이걸 논하기 전에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가상의 자아다. 자아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기억과 소통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나'란 서로 다른 삶의 문맥에 놓여진 어제와 오늘의 '나'가 기억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 '나'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서 타인의 인식 속에 살아간다. 이 두가지가 있다면 자아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깃드는 것이다. 게이머들은 채팅과 전투를 통해서 타인과 소통한다. 또 랩업과 인벤토리를 통해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기억한다. 블로거는 어떤가? 이들은 포스팅의 형태로 기억되고, 댓글과 트랙백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한다. 이것은 휴대폰과 구분되는데, 휴대폰은 자아의 두가지 구성요소 중 소통의 도구는 있지만, 기억되지 않는다. 통화가 끝나면 자아가 소멸되는 것이다. 즉 가상의 자아란, 실제 자아가 철회 되었을 때도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 자아가 있다면 그것이 게임이건, 웹이건 세계가 된다. 세계가 자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있다면 그 곳이 세계이다. 그런데 실제의 자아가 가상의 자아로부터 철회할 수 없다면? 그곳이 바로 매트릭스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현실이다. 나에게 온라인이란 오프라인 보다 광대한 영토이다. 이 영토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으로 측정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내는가? 특히, 게임방에서 몇날 몇일을 라면으로 연명하는 이들에게 오프라인이란 그저 집과 게임방 사이을 연결하는 귀찮은 물리적 한계에 불과하다. 이들은 게임 속에서 돈도 벌고, 친구도 만들고, 세력도 거느리고 있다. 이들의 생노병사는 점차 가상의 세계에 종속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보상심리나, 피해의식의 발로가 아니다. 삶의 터전의 문제다. 이들은 이미 가상의 세계로 이주한 것이다. 영화 속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영화 속의 인간들은 매트릭스로부터 철수 할 수 없다. 자신이 매트릭스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천적 지배다. 기계는 어떤가? 그들은 매트릭스의 창조자다. 그들은 인간을 건전지로 만들기 위해서 매트릭스를 지배하지만, 실은 자신들도 매트릭스에 지배되고 있다. 2편에서 등장하는 하먼의원과 네오의 대화를 들어보자. 네오 : 이 기계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건 아니죠. 하먼 : 그래, 당연하지,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 그런데 자꾸 의문이 생긴다네. 대체 지배란 멀까? 네오 : 원하면 기계를 꺼버릴 수 있죠. 하먼 : 맞아 그렇지. 그게 지배야. 여차하면 부술 수 있지. 그런 다음엔 조명과 난방, 공기에 문제가 생기겠지만
결국 인간이나, 기계나, 스미스 요원이나 매트릭스의 세계에 종속된 것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와 다를까? 가상의 세계를 둘러싼 이슈 중 가장 뜨거운 것이 중독이다. 대체 중독이란 멀까?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중독된 것일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오프라인 입장에서는 중독이지만, 온라인의 입장에서는 열정이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대이동, 대탈출을 이 시대는 중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 나 + 세가지 세계 2009/01/01 0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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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암흑의마법에서정의의칼로 2009/01/01 08:38 x
제목 : [060714] MMORPG의 법적 특징과 문제점; 아바타-페르소나를 벼리로
아바타의의법적지위.hwp 1. 저 자: lovol 2. 제 목: MMORPG의 법적 특징과 문제점; 아바타-페르소나를 벼리로 3. 연 도: 2006. 7. 4. 개 요: 급격히 팽창하는 MMORPG 영역에서 지금껏 많은 혼돈이 불거져오고 있다. 여기에는 MMORPG를 포커게임, 슈팅게임과 같은 류의 종래의 ‘컴퓨터게임(영상저작물)’ 장르로 인식하고, 그 재미의 본질을 개발자가 만든 콘텐츠를 플레이어가 소비한다는 일차원적인 것으로만 보는 관점이 통용되.. |
Tracked from 맥, 기술, 영화, 도서 그리고 삶 2009/01/01 16:42 x
제목 : 매트릭스
매트릭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워쇼스키 형제의 SF 영화이다. 네오와 그 친구들이 시온을 구하기 위해 매트릭스 안팍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은 정말 멋지다 아니할 수 없다. 화려한 그래픽 효과와 심오한 스토리는 최종편인 매트릭스3 레볼루션이 개봉한지 3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떨어지지 않고 아직도 많은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다. 이 그림은 매트릭스란 무엇인가에 대해 제일 잘 설명하는 그림일 것이다 최근에 잘 모셔두었던 매트릭스 DVD 세트를 꺼.. |
Tracked from Read & Lead 2009/01/05 19:46 x
제목 : 인간의 확장 2
미디어는 맛사지다김진홍 역/마셜 맥루한 저마샬 맥루한은 인간의 신체와 감각을 확장하는 도구나 기술을 미디어로 정의하고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이라고 규정했다. 즉, 책은 눈의 확장, 라디오는 귀의 확장, 옷은 피부의 확장, 자동차는 발의 확장, 인터넷은 중추신경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미디어를 통해 확장의 꿈을 실현시키고 더 넓은 세상과 더 많은 인간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세상과 다른 인간을 만나기 전에 필연적으로 미디어와 먼저 만나야.. |
Tracked from 현실창조공간 2009/03/31 14:31 x
제목 : 다시 비트에서 시작하자
음반 산업이 무너졌다고 좌절하는 이들이 많다. 긴 시간이 지나서야 이게 다 MP3 때문이라는 생각은 꽤 줄어든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음반 산업 자체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 보자. 애초에 아톰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즉 음악은 존재하되 음반이 아닌 비트의 형태로만 음악이 존재했다면? 그리고 우리들도 물리적 실체를 가지지 않고 단지 사이버 세계 안에서 유영하는 존재였다면? 이처럼 질문의 틀을 새롭게 짤 경우 무한의 가능성.. |
Tracked from 모바일게임평론 2010/05/17 22:59 x
제목 : 아바타-현 커뮤니티에서의 인격 노출과 관련된 이야기들..
재밌는 글을 읽고 트랙백하여 포스팅 합니다. 아바타를 견주어 MMORPG(GRPMMO)를 설명하신 점에 대해서 굉장히 흥미롭게 보고 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좀 뜬금없는 질문이겠지만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의 타자(분당)수는 얼마 정도 되십니까? 한 때 채팅이 굉장히 유행했던 시절 타자수가 빠른 사람이 각광 받기도 하는 묘한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 측정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경험담을 듣다 보면 한가지 생각을 찾아내게 됩니다. 타자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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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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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종교 종교와 고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설교이다. 고독에 대한 노목사의 깊은 성찰에 숙연해진다.
PS. 요즘 기독교가 공적이 된 것 같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기독교에 대한 혐오의 감정은 뿌리 깊다. 나는 기독교에 대해 누구보다 비판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기독교에 대한 외부 비판을 만나면 당황스럽다. 개독교라는 융단폭격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당했을까? 가슴이 아프다. 한명수 목사는 가장 보수적이라는 평을 듣는 기독교 장로교회의 초대 총회장을 지낸 거물급인사이다. 그러나 그는 낮은 곳으로 임하라는 가르침에 충실했다. 언제나 약자의 편에 있었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는 저항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사람들로 인해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전선이 흐려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현실은 디지털이 아니다. 한나라당의 고진화 의원, 장로교의 한명수 목사, 평화재향군인회의 표명렬 장군의 외로운 싸움을 지지한다. 관련글 : 한명수 목사표명렬 장군컴플랙스 고독과 종교 심심하다! 2007/07/25 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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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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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 대학교수가 학력을 속인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녀에 대한 비판은 주로 거짓말에 모아지고 있지만, 사실 거짓말은 흔한것이 되버린지 오래 아닌가? 그녀의 거짓말이 연일 톱으로 다뤄질 만한 가치가 있는걸까? 그녀의 진짜 죄는 다른데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능력에 의한 신분상승에 대한 먹물들의 강한 거부감(그녀가 단지 학력을 속임으로써 그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하는가?)과 고졸학력을 속임으로써 고졸을 숨겨야하는 부끄러운 것으로 만든것에 대한 범고졸(학력에 대한 일련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이들)들의 당혹감은 아닐까?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나의 관심은 이 비극적인 사기극의 배후에 있는 은밀하고, 폭력적인 힘과 그 힘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에 있다. 나는 그녀가 안쓰럽다. 도대체 어떤 힘이 그녀를 등떠밀었을까? 우리는 비정한 사회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을 경쟁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에서 꼴찌는 설자리가 없다. 50명의 학생이 있다. 이 중에는 일등도 있겠지만 꼴찌도 있기 마련이다. 꼴찌가 열심히 공부한다면 일등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꼴찌가 없어지는 것일까? 공정함은 자본주의의 위대한 업적이다. 경쟁을 통해 꼴찌가 일등이 된다는 것은, 과거 어떤 사회시스템보다 인간적이고, 효율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계급에 의해 일등과 꼴찌가 결정나는 사회는 얼마나 부도덕한가? 그러나 경쟁을 통한 공정함이라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여전히 비정하다. 경쟁은 비정한 사회가 꼴찌를 처벌할 수 있는 도덕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꼴찌는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 살아도 된다는 식이다. 자본주의는 꼴찌의 처벌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매타작일 수도 있고, 일터에서의 쫏겨남일 수도 있고, 철저한 무관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이 하자! 꼴찌는 범죄가 아니다. 공정함을 위해, 효율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경쟁이라는 시스템의 필연적 희생자일 뿐이다. 희생자가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사회가 정상일까? 낙오만으로도 이미 가혹한 소외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에게 위로가 있었다면, 이렇게 가혹한 운명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콤플렉스는 있다. 다만 없는 척할 뿐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두고, 자신도 그곳을 찾지 않는다. 그래서 비밀을 간직한 인간은 고독하다. 아니, 고독하기 때문에 콤플렉스가 생겨나는 것이다. 고독에서 콤플렉스로 연결되는 이 질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12억을 횡령해서 명품을 사고,가짜 학력을 만들어 교수가되고. 얼굴에 칼을 대서 미인이 된다. 한쪽에서는 거식증에 걸려 굶어죽고, 다른 쪽에서는 폭식증에 걸려 성인병으로 죽는다. 조증과 우울증. 카페인과 니코틴 그리고 알콜. 기술의 진보가, 자유의 확산이, 자본의 발달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이었을까? 어느 시대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좌절과 무의미함에 현대인은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고독하기 때문이다. 고독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이며, 그전에 자신의 고독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분리, 어머니와의 분리, 타인과의 분리에 대한 불안은 인간을 고독하게하며, 고독은 콤플렉스가 창궐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콤플렉스를 경험하지는 않는다. 고독은 콤플렉스를 만들고, 콤플렉스는 인간을 고독하게 한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데비존스의 심장. 누구나 이런 심장 하나쯤 어딘가에 숨겨두고 있다. 관련글 : 심심하다학원폭력의 최고봉고독과 종교 2007/07/24 0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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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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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다! 소통의 배후에는 침묵이 있어야 한다. 침묵이 전제되지 않는 소통은 빈곤하다. 침묵은 자아와 소통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가? 사람들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음악을 듣고, 핸드폰과 메신저로 수다를 떤다, 미니홈피를 돌아다니며 댓글을 단다. 쇼핑을 하고, 게임을 한다. 실시간으로 인터넷 뉴스를 본다. 침묵은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침묵조차도 '심심함'으로 폄화된다. 기술이 타인과의 거리감을 좁혀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자아가 소외되면서 타인과의 거리가 좁혀진다면 이 것이 무슨 소용일까? 껍데기끼리 만나는 것인데. 침묵과 소통의 균형만이 타인과 자아의 진정한 만남을 가져다 주고, 이러한 만남을 통해 타인과 자아가 풍요로워지는게 아닐까? 자아는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관련글 : 커뮤니케이션 과잉과 컨텐츠 빈곤 컴플랙스 고독과 종교 2007/07/23 0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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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심리 2007/12/25 22:34 x
제목 : 지성인에게는 침묵이 초합금제트다.
'침묵이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어쩌면, 침묵은 금 정도가 아니라, 초합금제트일 수도 있다. <마징가제트>를 만든 재료라는 그 초합금제트 말이다. 이 초합금제트라는 신재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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