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군대를 비하하거나, 무정부주의에 대한 어떠한 입장도 갖고 있지 않은 글입니다. 군대라는 특수한 공간이 인간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해 보기 위한 글입니다.
예비군은 왜 고약한 행동을 할까? 나는 동원 5년차의 베테랑 예비군이다. 현역으로 있을 때 예비군만 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 이 생활도 올해까지이다. 말년이란 말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예비군 훈련에 빠짐없이 참여하면서 훈련 때마다 생각나는 단어가 있다. 당나라부대. 예비군은 21세기 판 당나라 부대로써 손색이 없다. 물론, 예비군을 비웃을 생각은 없다. 그 책임은 민간인에게 군복을 입히고 딱 오늘만 군인 행세를 해달라며 얼래고 달래는 분단된 시대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지금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궁금한 것은 왜 모범적인 시민이 예비군만 되면 불량해지는가이다.
나는 이글을 통해서 군대라는 공간이 지닌 압도적인 폭력성과 군복이라는 획일화된 복장이 복종을 강요하고, 개성을 제거하여 죄의식을 희석시킨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나아가서 예비군의 고약한 행동을 복종과 죄의식의 틀에서 설명할 생각이다. 복종의 강요는 없어졌지만, 복장을 통한 개인의 개성은 여전히 억압되고 있는 특수한 환경이 예비군을 악플러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군대의 목적은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 국가는 일반적으로 살인을 통해서 지켜진다. 모순된 국제질서 속에서 살의는 일정한 명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명분이라는 것이 적에게 군대가 있기 때문에, 우리도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과 같은 식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경쟁자이면서, 둘도 없는 동업자인 셈이다. 어쨌든 군은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개인에게 삶과 죽음의 선택을 강요한다. 살려면 죽여야 하고 살인은 죄의식을 부른다. 살인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 죄의식을 제거하는 것은 지휘부나, 당사자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런 이유로 군은 살인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군비의 확충 못지않게, 병사 개개인의 죄의식을 덜어주기 위한 다양한 캠페인을 벌인다.
유명한 예가 총살이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3명이 도열한다. 2명에게는 공포탄이 지급되고, 한 명에게는 실탄이 지급된다. (공포탄 : 탄알 없이 소리만 나는 총알) 물론 실탄이 누구에게 지급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격이 끝난 후 사수들은 자신이 공포탄을 쐈다고 믿으면 그만이다. 내가 예전에 발사운영병으로 근무하던 장거리 미사일 부대의 무기체계는 5명의 팀원이 각자 휴대한 조원안전키를 돌려 락을 풀어야만 발사 명령이 하달된다. 즉 발사는 혼자하는 것이 아닌, 팀이 하는 것이라는 퍼포먼스인 셈이다. 또, 비운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조종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이 어떤 종류의 재앙을 떨어뜨렸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폭탄을 투하하고 전속력으로 히로시마 상공을 이탈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다.
무기의 발전은 살상력의 증대만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외 없이 살해행위와 살해현장을 공간적으로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미사일은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무기체계이다. 토마호크 마사일은 2,000Km 밖의 타겟을 5m의 오차범위에서 명중시킬 수 있다. 또 미군에 의해 실전 배치될 예정인 무인폭격기는 조종사 없이 적진을 도륙할 수 있다. 게이머는 벙커에 앉아 따뜻한 라떼를 마시며 모니터에 표시된 점들을 지워나갈 것이다. 이번 주에는 어떤 공연을 보러갈까를 생각하며..... 조만간 임요한과 같은 친구가 공군의 주요 전력으로 등장할 날이 머지않았다. 이처럼 현대의 무기체계는 살해현장의 참상을 가시거리 밖에 두고, 살의를 복잡한 관료주의에 분산시킴으로써 죄의식을 희석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국이 전쟁을 수행할 때 공중공격을 선호하는 것은 자국의 병사들이 죄의식에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죄의식은 파괴적인 전염성이므로......
영화 바벨에서 부유한 백인 아이들이 닭 잡는 놀이를 한다. 용케도 닭을 잡았고, 기쁜 마음에 어른에게 닭을 건넨다. 어른은 닭의 목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 살짝 비틀더니 머리를 쑥 뽑아낸다. 아이들은 충격을 받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맛있게 먹던 닭고기가 비극적인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이것이 어찌 아이들만의 일이겠는가?
군에게 죄의식은 적만큼이나 힘겹게 싸워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런점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대한 공격작전을 거부한 27명의 이스라엘 전투기 조종사들과 치열한 전선에서 크리스마스 케롤을 함께 불렀던 독일군과 연합군들은 인간성의 강한 생명력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한다.
죄의식과 함께 군에서 중시되는 가치는 복종이다. 절대적인 복종 없이는 총탄이 날아오는 전장에서 전진 앞으로를 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종은 여러 가지 장치에 의해서 내면화된다.
그 중 하나가 훈련소이다. 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들은 모욕적이며, 압도적이고, 동시다발적인 폭력에 직면한다. 그들에게는 하나같이 똑같은 군복과 철모, 그리고 위장크림이 지급된다. (위장크림 : 검은색 분) 병영은 중무장한 군인이 지키고 있으며, 국가는 군에게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분을 부여한다. 이런 다양한 장치는 순식간에 개인의 가치를 집단의 가치로 대신한다. 훈련병들의 개인적 가치관은 그들이 군대를 제대할 때 돌려받는다. 그들은 서서히 M-16을 위해 복무하기 시작한다.(M-16 : 총의 모델명)
또 다른 장치는 내무생활이다. 자대에 배치됐을 때 우리 부대는 통합막사라는 구형 내무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자대:훈련소를 나와서 제대할 때까지 생활을 하는 부대) 그 첫인상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80명이 넘는 고참들이 만연한 웃음을 띠며, 나에게 일제히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런 환영은 정말이지 괜찮은데 말이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본전을 만지작거리며, 복종을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훈련소가 공적 폭력성의 전주곡이라면, 내무실은 공적, 사적 폭력성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군 당국은 공식적으로 사적 폭력성을 부인하지만, 생활 속에 눅눅히 녹아있는 이러한 폭력성이야말로, 전쟁터를 더욱 박진감 넘치게 하는 영웅인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은 두 가지 맥락에 의해서 변화한다. 하나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외모이다. 공간이란 가정, 직장, 교회, 군대, 친구모임 같은 것이고, 외모란 얼굴, 복장, 체격, 인종, 학력, 경제력과 같은 것들이다. 이 두 가지 요소의 복잡한 조합에 따라 인간의 양심, 정체성, 개성, 캐릭터와 같은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다시 말해, 일터와 가정에서의 개성이 다르고, 성형수술을 하기 전과 성형수술을 한 후의 개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군대라는 공간은 동시다발적인 폭력을 통해 복종을 강요하고, 군복은 개인의 외모를 단일화함으로서 개인의 양심, 개성과 같은 내면적인 가치를 약화시킨다. 군대라는 공간과 군복이라는 외모는 군이 추구하는 가치의 수용을 수월하게 한다. 개인은 압도적인 폭력성과 단일화된 복장 속에서 죄의식, 굴욕감, 저항감을 슬그머니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고 딴청을 부린다.
복종을 강요하는 폭력성과 희석된 죄의식은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내가 군생활을 할 때 이웃부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취사병이 후임병을 홀딱 벗겨놓고 물고문을 한 것이다. 그것도 부족해 냉장고에 가두거나, 오븐에 돌리는(상황이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등의 가혹행위를 하다 적발됐다. 이것을 병적이라고 간주한다고 해도, 병영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상화된 폭력은 군이라는 공간과 군복이라는 몰개성의 부작용이 아닐까? 군대라는 공간은 복종을, 군복이라는 복장은 몰개성을 통해 죄의식을 희석시킨다.
지금까지의 틀 안에서 생각해보자. 예비군 훈련소는 예비군에게 복종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역은 선배님이라는 모호한 존칭으로 애매한 존중을 표한다. 예비군들은 아스라이 떠오르는 병장생활을 추억한다. 그리고 이들은 실제로 말년 병장처럼 행동한다. 반말하고, 장난치고, 명령한다. 현역들은 예비군들의 자유를 탐욕스럽게 갈구하면서, 예비군들의 근거 없고, 허무한 권위를 선선히 수용한다. 이 젊은 친구들은 벌써 복종의 경제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더는 복종을 강요하지 않지만, 군복의 착용은 여전히 의무화된다. 군복은 참 신기한 옷이다. 입는 순간 저 안에서 잠자고 있던 마초가 기지개를 펴고,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불량하게 걸어나오니 말이다. 마초는 시스템에 대한 적개심, 타인에 대한 무례함, 커리큘럼에 대한 무관심, 수컷 특유의 위협감을 드러낸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모범적인 사회인은 군복을 입는 순간 다른 사람이 된다.
교육은 타인에 대한 예의, 시스템에 대한 순종, 고객에 대한 친절을 평생 내면화한다. 이러한 것들은 복장, 얼굴, 지위와 같은 외적인 개성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군복은 획일화된 복장을 통해 개성을 약화시킨다. 약화된 개성은 교육이 만들어낸 것을 무력화시키고, 적개심, 무례함, 무관심과 같은 마음을 불러온다.
문제는 군복문화가 도처에 있다는 점이다. 군복문화는 지금 이 시간에도 악플러라는 망령이 되어 넷트를 떠돌고 있다.
덧. 이 글에서 적개심, 무관심, 무례함과 같은 것들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가정했지만, 이것은 다소 성급한 결론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것들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논리전개의 관성에 굴복한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기 때문에, 가설로써 남겨두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동양식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고 가정해볼 수도 있다. 아래는 다른 가설에 따른 다른 결론이다.
이것들은 예비군들이 현역으로 있던 기간동안 차곡 차곡 내면화해서 말년병장에 이르러 단단하게 굳어진 내면적 개성이다. 그가 군생활을 마치고 위병소 정문을 활짝 열어졌힌 후, 사복으로 갈아입는 순간 군복으로 대표되는 외면적 개성과 내면적 개성의 링크가 사라진다. 그는 사회 초년생으로써, 입대전에 이미 내면화한 생활양식과 앞으로 그에게 요구될 양식을 내면적 가치로 받아들이고, 군에서 형성된 개성은 사라진다. 아니, 잠복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1년 후 그가 예비군이되어 군복을 입으면 잠복하고 있던 개성은 우리 앞에 나타나서 오랜만이라며 악수를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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